종죽산해정 (種竹山海亭)

 

 차군고불고(此君孤不孤)

 염수즉위린(髥叟則爲隣)

 막대풍상간(莫待風霜看)

 의의저견진(猗猗這見眞)

 

 산해정에 대를 심다

 대나무는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
 소나무와 이웃하였네
 풍상치는 때를 보려고 하지 말게나
 흔들리는 모습 속에 참뜻 보겠네.

 남명 선생은 출생지인 합천 삼가를 떠나 김해 탄동(현 대동)에 1530년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김해지역에 처음으로 서원과 같은 성격의 교육기관인 강학을 시작함으로서 유교적 풍속 교화가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해지역은 왜구의 빈번한 참탈로 인해서 문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대신 바다와 접한 해상과 국방의 요충지이자 고래로부터 철의 생산지였기에 물류 중심지로 발달한 지역이다.
 이런 연유로 김해는 문인 배출이 거의 전무하여 학문적 기반이 약한 반면, 무과 급제자가 많았다.


 남명이 부친 상을 치르고 살림이 곤궁해지자 부유한 처갓집에 의탁하여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처지에 이르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8년간 머물렀다. 그러니까 30세에 산해정을 지을 터를 마련하였는데 이곳은 처가곳으로 탄동이라 했는데 후일 주부동(主簿洞)이라 하였다.
 그 연유는 남명이 전생서 주부 벼슬을 받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해정 당시 조정으로부터 주부 외에 헌릉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으면서 벼슬과 거리가 먼 처사로서의 삶을 굳힌 것으로 본다.


 이 당시 시 3편을 통하여 선생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선비의 기품을 대나무에 비유하여 부패한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처사로서 올곧은 삶을 이곳에서 보내겠다는 의지로 대나무를 심으며 다짐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종죽산해정>을 소개한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