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중국의 고승 마조는 당나라시대 육조 혜능의 제자인 남악 회양선사로부터 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육조란 달마대사의 여섯 번째 법통을 이은 제자라는 의미이며 혜능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의 시조입니다. 그리고 마조는 그 혜능의 손제자 뻘이 됩니다. 마조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과 제접을 하였기 때문에 후대에 많은 화두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마조어록'에는 천금과 같은 선문답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 선문답 중 하나입니다.

 「마조가 하도 좌선을 많이 하여 그 모습이 마치 나무 등걸 같았다. 그러나 회양선사는 그 때 마조의 공부에 진전이 없음을 알고 마조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무엇 때문에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회양이 벽돌을 갈고 있었다. 마조가 그 소리를 듣고 찾아가 물었다. “벽돌은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어떻게 벽돌로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 “그러면 좌복 위에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하나 수레를 때려야 하나?” 이 말끝에 마조는 확연히 깨달았다.」

 '마조어록'에 담긴 그의 스승인 회양선사와 마조 사이에 깨달음을 두고 나눈 이야기입니다.

 깨달음의 삶이란 가만히 앉아 좌선만 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다그쳐 가는 일이라는 가르침을 표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수레가 환경을 비유한다면, 소는 바로 자신을 가리킵니다. 당신은 지금 수레를 탓하고 있습니까, 소를 다그치고 있습니까? 결국 그 답은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걸쳐 1천 년의 황금기를 누린 불교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철저히 무너진 이유는 권력과 재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인재가 없어서였습니다. 당시의 불교는 국가로부터 엄청난 지원과 보호가 있었음에도 오직 수레를 단장하고 치장하는 데에만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고려 말 우승유와 이종민이 이끄는 우당과 이덕유를 영수로 하는 이당 사이에 무려 40여 년간 지속된 정치 투쟁인 '우이당쟁' 한 가운데에 불교가 휩쓸리게 됩니다.

 우이당쟁에서 실권을 장악한 이당의 이덕유는 무종에게 폐불(廢佛)을 건의하게 됩니다. 당시 불교의 부패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승려의 수는 30만 명에 이르렀으며, 사찰이 소유한 토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일반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심지어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찰이 있는가 하면, 승려가 관리와 뒷거래로 조세를 착복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종은 842년, 폐불의 결정과 함께 845년에는 전국의 4천600여 개 사찰을 모두 허물고, 승려를 환속시켰으며, 사찰의 토지와 노예를 몰수했던 것입니다.

 조선 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전은 새로운 국가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야심으로 '불씨잡변'을 써서 불교계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불교의 주요 논리를 단순히 표면적인 차원으로만 해석하여 지적한 것임에도 당시 불교계는 이러한 유교의 허술한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인재가 전무했던 것입니다. 물론 승려들의 부정부패 등 불교의 오래된 폐단에 대한 단편적인 지적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는 분명히 불교계에서 깊이 반성하고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했으며 또한 유교의 폐쇄적인 정합성을 불교교리를 근거로 타파해야 했습니다.

 불교는 다분히 진보성을 띠고 있으며 상업을 기반으로 일어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불교가 이러한 정화를 통해 바로 선 노력으로 유교의 폐쇄성으로 국가를 건져내고 신라와 고려가 행했던 개방정책으로 조선을 이끄는데 조력을 했었다면 지금의 한국의 모습은 전혀 딴판으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결국 수많은 사찰들은 폐치되고, 승려들의 지위는 천민으로 떨어지는 동안 속세로 돌아가는 승려가 많았던 탓에 불교의 그나마 남아 있던 암흑기를 타개할 만한 유능한 인재들까지도 안타깝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인재는 보이지 않고 화려한 수레만 그득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조계종을 필두로 한 한국불교는 사찰만 증축하고 있습니다. 지금 “법당 100채 보다 사람 한 명이 낫다”는 탄허 스님의 말씀은 시대를 넘어 한국불교 전체를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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