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너는 아직 도(道)를 모른다." 부처님께서는 또 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밥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너도 아직 도를 모른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렇다. 너는 도(道)를 아는구나." 사십이장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숨 한번 쉬는 극히 짧은 시간을 우리는 순식간이라고 합니다. 그 순식간을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을 깨달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짧은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찰나'입니다. 왜냐하면 순식간은 10의 -16승의 크기이고, 찰나는 10의 -18승이므로 찰나는 순식간의 1/100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임에도 모든 것은 찰나에 생겼다가 찰나에 소멸합니다. 모든 것이 찰나임을 알면 ‘참 나’가 생기(生氣)를 얻게 됩니다.

 죽고 사는 것조차 한순간, 또는 찰나임을 알고 욕망을 버리면 집착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찰나에 모두가 한없이 인연생기하고 융화하여 지금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나의 중심으로 보면 이곳에 목숨이 있고, 여기에 부귀와 직책과 고통, 한숨이 담겨있습니다. 우주의 본질과 크기에 비한다면 개인의 목숨은 순식간이요, 찰나이기 때문에 여기에 붙어사는 부귀와 고통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바로 순식간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와 명예는 온통 전부이며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자고 매달립니다.

 그리고는 흩어지면 사라지는 먼지와도 같은 부와 명예를 지니고 있다고 오만을 떨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순간적인 과정일 뿐임에도 말입니다. 따라서 '참 나'에 기생하고 있는 부와 명예 따위에 자신의 본질을 흐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공의 의미를 새겨보면 이러한 의미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공은 '허공'의 다른 말입니다. 정해진 공간에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그곳을 허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허공도 비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숫자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허공은 10의 -20승으로 10의 -18승인 찰나의 1/100에 해당합니다.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로써, 불교에서는 '허공'은 빛과 모양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지만 실지로는 상(相)과 성(性)이 있는 분명한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자리가 없다함은 꽉 채워져 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러한 찰나 또는 허공위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생기고 소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대단한 명성을 지녔다거나, 많은 재물을 가졌다고 하거나, 겪고 있는 괴로움이 크다고 한들 거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찰나와 같은 현상임에도 그 앞에 '너무'를 붙여 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그저 사랑하면 될 걸 '너무 사랑하고', '너무 미워하기도 하며', '너무 희망을 갖기도 하고' '너무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그때부터 바로 집착이 됩니다. 그리고는 찰나 같은 실체를 지속하려 애씁니다. 미워할 수 있으나 오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행복도 당연히 변합니다. 그래서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때부터 분별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인연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받아는 들이더라도 집착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고난을 만나거든 절망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고난을 겪어 냄으로 인해 쌓은 공덕으로 '참 나'에 붙어 있던 악업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며 절망으로 인연 짓게 했던 업장이 차례차례로 풀리기 때문입니다.

 '참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의식과 무의식에는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내가 행했던 행동들이 차곡차곡 누적됩니다. 현세의 생각과 체험의 누적이 곧 현세의 업이 되어 다음 세상의 씨앗이 됩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중생은 지, 수, 화, 풍의 사대로 이루어졌으므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거늘, 어찌하여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이 따릅니까?" 보수보살은 "그가 지은 업에 따라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행위의 실체는 없습니다. 마치 밭에 심은 여러 씨앗이 제각기 서로 알지 못하지마는 자연히 움과 싹을 내는 것처럼 모든 업의 성품도 그와 같습니다." 화엄경 보살문명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찰나에 매달리지 않는 신념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모든 시련에는 오히려 나를 정화하고 선업을 쌓게 하는 기능을 찾게 됩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