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녀 송현이 이야기

박경용 가야스토리텔링협회장

순장녀 송현이 이야기


 송현 아가씨는 이 소문을 듣고 가족의 살길을 위해 밤낮 고민하다가 스스로 궁궐 문 앞에 가서 지원하러 왔다고 말했다. 담담관은 절차를 거쳐 궁녀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임금님도 만족해 하시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한 없이 우셨고 송현 아가씨 이웃에 사는 청년 경윤이는 놀라움과 함께 슬픔에 빠졌다. 그는 송현이를 짝사랑해 왔고 고백할 것을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송현이를 데리고 이웃 나라 신라나 백제로 달아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궁중에 들어간 송현 아가씨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송현이는 날마다 달님에게 기도했다.

 "우리 임금님 더 오래 살게 해 주세요. 나의 어린 동생들이 더 큰 후에 내가 순장되게 하여 주세요."

 송현의 기원에서인지 임금님은 원기를 회복하시고 건강을 유지하게 되었다.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궁녀를 임금님은 손녀처럼 귀여워해 주셨다. 임금님은 송현 궁녀가 너무가 가엾게 여겨졌다.

 '저 아이를 꼭 순장시켜야 하나...."

 신하들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은 일제히 순장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권력 유지와 통치에 순장은 백성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다스리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라 해도 그 이상은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임금님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한편 송현이도 어린 동생들이 클 만큼 컸고 집안 형편도 나아져 죽어도 가족 걱정은 해결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송현 궁녀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 며칠 묵었다. 궁녀가 궁 밖을 나오면 관례에 따라 궁녀 몇 명이 대동했다. 그 사이 송현 궁녀는 궁중에서 가져온 보석과 팔찌 등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웃 청년 경윤은 함께 온 궁녀들의 눈을 피해 송현이를 만나서 신라나 백제로 달아나자고 제안하였다. 송현은 동생들의 안전을 위하고 임금님께서 배려해 주신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달아날 수 없다며 순장에 대한 각오를 눈물 흘리며 말하기도 했다. 송현과 경윤은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그러다 임금님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봉어하시었다. 송현은 늘 각오는 하고 살아왔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무섭기도 하고 경윤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사무쳤다. 임금님의 장례지는 애꾸지(지금의 대성동 고분)였다.

 한편 송현의 동생들과 송현이를 사랑하는 경윤 청년은 근처에는 못 가므로 동남쪽에 위치한 등성이(50년대 말 운동장 조성을 위해 없애고 지금은 수릉원)에서 숨어서 지켜 보았다. 임금님의 장례식 하관 때 임금님 시신에 절을 하고 칼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손현은 눈을 감고 앉았고 저쪽에서 북소리가 나고 악기 소리가 들리었다. 송현은 무서운 생각이 들다가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멍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칼잡이가 춤을 추는 몸짓을 하다가 목 뒤편을 후려졌다. 목덜미에서 선지피가 뿜어나오고 이미 송현은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16세 가야 소녀 송현은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동생들과 경윤 청년은 몸부림치며 울었다. 임금님 시신 곁에 송현을 포함 여자 3명, 남자 2명이 같은 절차를 밟고 순장되었다. 너무나 가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그 이후 순장을 반대하는 백성들의 여론이 높아갔다. 드디어 신라 지증왕 마립간 때 순장제도가 없어지고 이후 가야도 없어졌다.
 
 송현 아가씨가 순장된 지 20년 후였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가왕권의 권력 체제가 확립되고 안정기에 들어가면 순장은 없어진다고 하였다. 지금도 순장자가 발굴되면 목 뒤편 뼈에 칼자국이 남아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데, 없는 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경우라고 한다.
 
 사람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고 효성 많고 인정 많은 순장녀 송현이를 잊지 못했다. 지금도 가야의 순장녀 송현의 애달픈 이야기가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ㅁ 감국의 전설

 평화스런 가야국 질지왕 때의 일이다. 수도인 김해에는 중년의 화가가 살았으니 그의 이름은 웅암이었고 집은 남쪽 바다의 망산도가 내려다보이는 불무산 아랫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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