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백의(白衣)를 입었나?(5)

전경배 인제대 초빙교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는 물가가 크게 올랐는데, 특히 염색하는 집에서 값을 크게 올려서 일반 사람들은 그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만, 도리어 부자들은 사치를 일삼아 값을 다투지 않아 염색하는 값만 더 올랐다고 하였다.
  이익(李瀷)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옷 한 벌을 염색하려면 그 남(藍)을 심는 밭이 네 식구가 한 달 먹을 곡식이 나는 땅을 버리는 것이 되니, 국내 전체를 계산한다면 손실이 매우 많다"고 했을 정도로 염색은 비용이 든다. 때문에 너무 가난하다면, 염색 옷을 입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도 흰옷을 즐겨 입었고, 고려시대의 임금들도 평상복으로 흰옷을 즐겨 입었다. '고려사'의 1253년 기록에는 백은(白銀) 1근을 갖고도 20승(升 -피륙의 날을 세는 단위) 백저포(白紵袍) 1필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록 이 기록이 특별한 상황을 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흰옷 가운데 값비싼 옷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흰옷이라고 해서 저렴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난한 천민이나 노비들도 황색, 청색 등 염색한 옷을 입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흰옷을 즐겨 입게 된 것이 아니라, 흰옷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입은 것이라도 할 수 있으니 상복은 흰 천으로 지어지는 옷이므로 일상생활에서 상복을 입어야 할 시간이 길어서 흰옷을 입지 않았는가? 의구심을 가져본다.

 우리 민족의 흰색에 대한 숭배는 언제부터였을까? 북애자(北崖子)가 썼다는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흰소를 잡아서 태백산록(지금의 백두산)에서 천신에 제사 지냈다. 예전의 법에 천신에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길일을 정하여 흰소를 골라 잘 비육하여 그 소를 잡아 머리를 산천에 제물로 드리니 백두란 쇠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대개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조상에게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에게서 비롯되었다' 백두의 의미가 그럴 듯하지만 신빙성은 없다. 하지만 흰 동물을 숭배함은 지금 현대사회에서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백사는 최고의 영약이요, 흰 호랑이가 태어나면 나라에 길조가 있고 백마는 언제나 행운의 상징이어서 왕들이 주로 타고 다녔다.

 좌청룡이면 우백호이니 흰색 숭배는 끝이 없다. 그리고 백마의 숭배는 동북아시아 유목민족 문화권에서는 한결 같은 풍습이다. 또한 백설기는 신성한 우리의 제사에서는 필수적이다. 농경사회에서 쌀은 그 자체가 신성함이었고 쌀을 그대로 빻아서 찐 백설기는 순수한 농민의 마음이었다. 물론 흰색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음의 원인이 염료기술 문제와 비싼 경비 탓도 없음은 아니나 싼 먹물조차도 거부했음에는 민족성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상술한 것처럼 백의의 선호사상을 꼬집어 이것이 다 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일제강점기에 우리를 폄하하는 식민사관으로 조선인은 원천적인 염색기술이 없어서 흰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부 지식층의 왜곡된 가치관을 불식되어야 하며, 해방이전 우리사회는 농경사회이므로 집성촌으로 구성되어 왔다.

 집성촌은 다른 집성촌과의 우월적인 지위를 향유하려면 유교적인 도덕관으로 관행적으로 향약(鄕約)내지 향규(鄕規)로써 인(仁)을 근본으로 예의지신을 실천해온 그러한 사회에서는 상례를 으뜸 예의로 여겨왔으며, 상례는 혈연을 중심으로 상복을 입어야 하므로 상복을 입어야 예의(禮義)를 갖춘 사대부라고 자평을 하였으며 상복을 입어야 할 사람이 상복을 입지 않으면 이단자(異端者)로 보았으며 이러한 전통은 관행으로 이어져 왔으며 상복을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고착된 관념이므로 상복과 흰옷은 불가분의 관계가 형성되므로 흰옷을 입지 않았나? 이러한 사실로 우리조상님께서는 흰옷을 입었다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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