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백의(白衣)를 입었나? (2)

전경배 인제대 초빙교수

흰옷은 색옷에 비해 염색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1275년 고려에서는 사람들이 흰 모시로 등거리을 많이 해 입으니, 이를 금(禁)하자는 상소가 올라오고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36~1308)이 이를 허락하는 일이 생긴다.
  이후 고려에서는 1357년(공민왕6년 정유년)과 1382(우왕8년 임술년)년에 같은 이유로 흰옷을 금지하는 조치가 나왔다. 조선에서는 1398년 이후 1792년까지 23회에 걸쳐 흰옷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진다.
  특히, 조선조에서는 오행론(五行論)이 관행처럼 널리 펴져있는 민간사상과 옷에 색깔에 대한 부귀(富貴)를 열망한 것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즉 오행론에 따려면 목(木)은 청색(靑色), 화(火)은 적색(赤色), 토(土)는 황색(黃色), 금(金)은 백색(白色), 수(水)는 흑색(黑色)으로 보았으며, 백색은 바로 황금으로 인식하여 많은 백성들이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보이지 않은 비보(裨補)사상이 옷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고 오행론에 얽매이는 것을 조정에서는 원치 않았다고 본다. 동방은 청색, 남방은 적색, 서방은 백색, 북방은 흑색, 그리고 중앙은 황색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방위색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흰옷은 상복(喪服)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목적과 부합되지 않으면 착용을 금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초기에는 백성들에게 흰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에 대하여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서민까지 반대목소리가 나타나고 있다. 조선 초기 대학자이며 정객인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는 1471년(성종2년) 왕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의복의 빛깔을 정하는 문제를 거론했다.

 “단군조선 이후로 우리가 흰옷을 입었음에도 천년, 오백 년의 긴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많았는데, 흰옷이나 회색옷을 입는다고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요망한 말입니다. 오행의 논리로 말한다면 중국 사람들도 푸른 옷을 입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으니, 우리도 회색이나 백색을 금지하지 말고 임의로 입게 하소서. 요즈음 회색과 백색 옷을 금지시킨 후, 공경대부에서 군인, 장사치, 천인,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황토색 옷을 입게 되어 상하의 구별이 없으니, 이제부터 옷의 빛깔을 정해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오행론에 따라 맹목적으로 흰옷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였다.

 우리민족이 입고 있는 흰옷은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산물이라고 일제강점기 위정자들이 우리를 폄하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염직이 우리나라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先史時代부터이며, 본격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염직문화(染織文化)가 이루어졌다. 섬유의 원료가 되는 마(麻), 면(棉), 견(絹)의 재배에 적당한 기후와 방추차, 망추 등의 사용 흔적이 기원전(前)까지 올라가고, 우리보다 앞서 발달한 중국을 통해 염직기술을 수용하였으며, 신라시대에 염직관청이 정비된 이후 고려시대에는 염직문화가 상당히 활기를 띠어 조형성(造形性)이 뛰어난 염직물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염직기술과 제도를 계승하여 발전시켰으며, 관영수공업의 활성화로 염직문화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염직은, 그 조형적인 특성이 색채, 문양, 소재 등에서 두드러졌는데, 우선 색채 면에서 보면, 우리민족이 선호하는 색상은 음양오행에 의한 사상성, 기후에 의한 풍토성, 민간신앙에 의한 주술성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음양오행에 의한 오방색의 사용은 우리민족의 색 선호를 좌우했다. 오방색은 방위와 계절을 뜻하는 색으로, 전통적으로 재앙과 잡귀를 막아주는 주술색인 홍색, 백색, 흑색과 제왕의 색인 황색, 그리고 희망과 청춘을 상징하는 청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색상이 궁중예복, 조각보, 오방낭자 등 의식주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에 활용되어 그 색채의 배치 배합에 있어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