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논설위원

한상규 논설위원

요즘 우리 사회에서 흔히 부딪히는 현상에서 그 원인을 살펴보면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다 보니 타인의 입장과 마찰을 빚으면서 언쟁이 오간다. 오래 동안 한곳에서 사는 사람은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을 경계하고 살핀다. 반면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은 미리 정착한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한다. 김해지역은 타 지역보다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 결혼 이민 취업 등으로 인해 생활하는 다문화 가족이 많다. 이들은 그들 나라보다 고 임금을 받기에 여러 가지 불이익과 고생을 참으면서도 현지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김해지역은 타국에서 타 국민을 너그럽게 받아드려 그들이 한국인과 똑 같은 입장에서 대우받기를 원하고 있다. 이 같은 문화는 고대 가야국의 김수로왕의 부인이 외국에서 온 최초의 인물로 황후로 봉해졌기 때문에 지금 다 문화 가족이 타 지역보다 살기 편해서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보면 처음부터 고유의 토속문화가 있었지만 낮선 외래문화를 포용하고 흡수·통합하여 차츰 우리의 전통 문화로 자리 잡혀갈 공간을 내어 주었다.

 고구려 소수림왕2(372)년에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가 들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불교문화를 보면 백제 고구려와 다른 점이 있다. 신라는 험준한 태백산맥에 갇혀 외래문화를 두 나라에 비해 상당히 늦게 받아들였다. 높은 산악지대와 깊은 골자기가 척박한 농경으로 백성들의 삶은 빈곤하였다. 그러다 보니 산신(호랑이)각을 세우고 일월신(日月神)을 섬기고 용왕신을 받드는 등 토속신앙이 강해서 외래문화 수용을 꺼려하였다. 이런 지정학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도자들이 고안 한 것이 '나약한 종교적 신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힘을 기를 필요를 느꼈다. 그 힘은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국력을 모우기 위한 절묘한 방안으로 유불도(儒佛道)를 통합한 '화랑도'를 만들어 통일의 염원에 불을 집혔다. 그 배경에 김해 출신 김유신 장군이 선두에서 힘을 모우고 길러서 통일의 견인 역할을 하였다. 즉, 신라인은 부처의 힘으로 힘+꿈(통일)의 조합을 이루었다. 이것이 '협치'다. 고구려는 최북단에서 한당(漢唐)의 중국세력을 방어하느라 국력을 소진하여 미처 통일의 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백제는 일찍이 양나라와의 무역과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번영을 꾀했으나 중국을 재패한 당과의 외교 실패로 힘과 꿈을 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신라는 김유신과 화랑도의 힘과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친당(親唐)외교에 의상 원효 같은 애국적인 고승의 불심이 국민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또한 지도층과 국민의 절묘한 협치다. 요즘 정치계에서 거론하는 '협치'는 여야의 관계에서만 풀어 나가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 국민들도 그렇게만 알고 있다. 천여 년 전 신라의 스님 충담의 〈안민가安民歌〉속에 '답게'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이후 이 말이 구전되어 회자되고 있다. 충담은 삼월 삼짓날 경주 남산 '삼화령'에서 미륵불에게 차(茶) 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경덕왕을 만나서 와이 선치(善治)의자문을 구하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라는 노래를 불렀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으로 의미가 깊은 말이다. '사람답게' 사는 길에 불교 사상과 유학사상이 있다. 불교는 선업(善業)으로 내세 극락을 약속했고 유학에서는  군신(君臣), 부부(夫婦), 부자(父子), 사제(師弟), 친구(朋友) 사이의 '답게'를 교화 하면서 올바른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라고 했다. 요즘 경제, 고용, 남북외교관계, 부동산등 현안이 산적하다. 이런 것을 동시에 다루는 정치인은 골몰하리라 본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논객의 입장에서 무관심할 수 없어서 팬을 들어 보지만 혜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지도자들처럼 혜안이 있는 사람들에게 '협치'의 가능성을 배운다면 남북통일의 난제도 풀리지 않을까?

 그 중 하나가 국민 각자가 신분 직위를 떠나서 '답게' 만드는 격(格)을 자리 잡는 것이 '협치'의 기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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