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취운루차판상운 - 허 훈금벽고루제경선좌래혼약십주선동룡이랭경과지첨연초회설만년고수운여나대취공담월사한시원류모갱각파광원일도은하거묘연단청 높은 루에 비그치니 경치 아름답고앉아보니 십주의 신선 같구나궁궐 같은 전각 한가하니 전쟁 지난 곳이요처마의 제비 돌아오니 장막 쳤던 그 해로다.고목에 구름 걸리니 신라대 비취빛 이요텅빈 못 달빛은 둥글기 한나라 때 같아라두루 돌아보니 다시 물빛 아득하다 느꼈더니한 줄기 은하수가 아득하구나.작가 허 훈은 『읍지』에 "만장대"를 남겼다.서림사 벽에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읍지』에 작가의 시가 실리고 호를 월강이라 했지만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구를 '구지봉'편에서 우리글로 '귀'와 '구'로 해석하며 소견을 밝힌 바 있다. 신어 산의 거북바위라면 귀암으로 쓰고 읽어야 하는데 구암과 구암으로 표기하고 읽는 것은 가락고도 김해만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바위와 돌이 기암괴석이라면 가락고도는 구암귀석이다. 시조 수로 왕을 배출한 성스러운 땅임을 자긍심으로 이어가는 가락가야 도읍지의 독창적 문화를 가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차라는 글자가 당대에 만들어졌음을 『다경』이 확인시켜준다 하였다. 실제로 『다경』이전의 문헌에서는 차라는 글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보다 한 획 많은 도자가 있다. 도자는 서한시대 사람인 왕포의 동약에 실린 "포별팽도 무양매도"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이 도를 차로 해석해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한 대에서도 도릉이라는 지명을 볼 수 있는데 반고 권 15상에 :도릉절후 유흔:이 나온다. 육우는 『다경』에서 시대미상의 「다릉도경」에 대해 "다릉이란 능곡에
서유기의 도입부에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손바닥 안, 오행산에 갇히기까지의 손오공의 천방지축의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손오공이 불법을 구하러 떠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불법을 구하려는 이유가 갈애를 풀기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해서 배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바로 손오공 같은 존재입니다.정법(正法)의 수호자가 되기 전까지의 손오공, 부처님한테 갇히기 이전의 손오공입니다. '강한 자가 지존'이라는 영웅심에 함몰이 되어 있습니다. 욕망이라면 무엇에도 거침없는 자유혼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김해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씨앗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백월산은 옛 가락국의 땅이요 김해군 관할이었으나 지금은 창원시 복면이다. 백월산을 몇 번 찾아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어떤 이는 백월산이 옛 김해군 녹산면에 있는 명월산이 와전된 것이라고 했다. 명월산의 명월사 주변도 몇 차례 살펴보았지만 차나무는 찾지를 못했다.필자는 김해의 차 자생지를 찾기 위해 차와 관련된 지명과
서유기는 어리석은 마음을 지닌 손오공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은 정말 가관입니다. 마음의 수양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습니다. 손오공은 일흔 두 가지 온갖 변화 술법을 이용하여 천계와 하계, 용궁, 염라대왕이 사는 유명계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질서를 흩트려 놓습니다. 그는 생사부에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버리는가 하면, 천상의 복숭아를 함부로 따 먹고 선가의 신약인 금단을 먹어치우는 등, 어떠한 것에도 속박되지 않습니다. 또한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들까지 자신의 농락에 쩔쩔 매게 만들며 온갖 권위를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말을 믿고서 명승을 두루 밟아분성 성북으로 이끌려 찾았네라.금관 옛 나라 천지도 늙어임금이 탄 수레 노닐었던 세월 희미하다.시조의 능은 깊어 적적하고장군 차나무도 늙어 풀이 무성하다.가야의 옛 문물 아직 남아 있으니풍요로이 주인의 노랫소리 다시 낮아진다.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여덟 번째『김해읍지』는 “금강사는 김해부의 북쪽 대사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대사리는 큰 사찰이 있는 고을이란 뜻인데, 지금은 대사리 지명도 금강사도 그 흔적도 없다. 다만 한 륜의 「불훼루기」에서 ‘누’를 승려들이
서유기의 첫 편은 심원귀정 육적무종(心猿歸正 六賊無)의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손오공을 심원(心猿)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마음 원숭이’입니다. 단순한 원숭이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불리는 원숭이입니다. 처음에는 분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패악 짓을 하다가 나중에는 성불하여 지혜를 갖춘 ‘마음 원숭이’가 됩니다. 지혜가 드러나기 전의 마음이란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원숭이였지만 마음을 바른 정도로 세워 귀의하니까 여섯 도둑의 자취가 사라져버린다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마음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초발심이며 이는 바로 정각을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이어서 계속>>> 전대의 왕조 충렬왕이 여기에 연을 멈추고 장군차라는 이름을 내어주어 부로들이 서로 이 일을 미담으로 전해온다.내가 소년 시절에 객으로 왔을 때는 바야흐로 중춘이라 산다가 무성하게 피어 반나절을 머물며 구경하였으나 넉넉하지 않았다.다만 기둥과 추녀가 낮아 작은 나뭇가지와 잎이 얽히고설키어 멀리 보기가 어려웠는데 문 밖으로 나서자 곧 산과 바다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어 이리 저리 거닐며 시를 오래도록 읊다가 돌아왔다.그 뒤에도 다시 한번 유람할 계획이었으나 아직까지 뜻을 이행하지 못했다.이제
서유기는 손오공이 도술 익혀서 천상세계를 어지럽히다가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해서 오행산 바위 밑에 500년간 깔려 있다가 현장 법사를 만나 불경을 구하러 가는 그런 단순한 여행기가 아닙니다. 손오공의 인생역정 속에 불교와 도교의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는 일종의 경전인 셈입니다.손오공은 부처로부터 벌을 받아 500년간 바위 밑에 갇혀 있으면서도 분노심을 다스리지 못해 불같은 성질을 주체하지 못합니다.분노는 탐ㆍ진ㆍ치 삼독 가운데 하나인 진심(嗔心)입니다. 진심에는 반드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왜냐하면 분노는 의리나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이어서 계속>>> 초명은 유였으나 향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다시 초명인 유로 부르게 되었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원나라를 자주 왕래하며 주자학을 배워 우리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보급하였다.그가 죽자 1318년 충숙왕은 그 훌륭함을 기리고자 궁에 있는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묘사한 것을 조선 명조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고려시대 최고의 명신이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이어서 계속>>> 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여섯 번째감로사를 후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로사 시를 남긴 안 유의 후손 안민의 행적 때문이기도 하다. 안공은 이 절에와서 선조가 남긴 감로사 시를 시판에 새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감로사의 승려들로 승군 백 여명을 조직, 김해성으로 향하다 입석강에서 왜군을 만나 싸우다 순절하였다. 안 민은 임란 최초의 의병장이자 승군장일 것이다.『읍지』 인물조는 안 민을 “순흥인으로 함안에 살았는데 문성공 유의 11대손으로 관지감찰. 임진년 봄에 감로사에 있는 문성공의 시판이
서유기는 손오공 일행이 불교 경전을 얻기 위해 서천(西天)으로 떠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현장 삼장법사가 쓴 대당서역기에서 서천은 현장이 다녀온 인도를 가리키지만 서유기에서의 서천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도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 불멸속의 일부분인 해탈, 즉 깨달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한 서천은 종착지가 아니라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이정표로서, 자기 삶의 한 마디를 마무리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모두에게 희망으로 회자되고 있는 웰빙에서 웰에이징, 그리고 웰
현장법사는 수나라 말, 불교를 신봉하는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교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둘째 형을 따라 열한 살 때 출가를 해서 12살에 정식으로 계를 받았습니다. 그가 공부에 매진할 당시에는 제대로 번역된 불경이 많지 않아서 교리 해석에 많은 논쟁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구법승들이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임에도 불경을 구하러 서역으로 구법여행을 떠나는 일이 잦았던 때였습니다. 현장도 당시의 구법승들처럼 불교의 발원지인 천축국(인도)으로 가서 불경을 구하고자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무산되었다가 스물아홉 살이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이어서 계속>>> 위 기록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즉위 2년 정월에 서울을 정하려고 땅을 살피면서 말한 내용이다. 서기 43년이면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가락국에 시집온 때인 서기 48년 여름이므로 가야불교를 허황옥 공주가 들여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할 것이다.가야불교, 가락불교란 표현이나 용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불교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창국주가 그 신하들에게 새 도읍지를 설명하면서 불교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신하와 백성들도 불교의 힘을 잘 알고 있
이어서 계속>>>김해의 불교와 불우에서 부른 노래찬금관성파사석탑 - 일 연재압비범천패범걸령차막해도경기도도안부황옥천고남왜알노경파사석탑을 기리며누를 것 싣고도 비단돛배 붉은 깃발 가벼워라신력게 빌어 바다 파도 놀라지 않게 고요히 속였다.어찌 황옥만을 위해 이 기슭에 닿았으랴예부터 성난 고래 같은 남쪽의 왜를 막으려 함이다.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다섯 번째파사석탑은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가 서기 48년 가락국 시조 수로왕에게 시집을 올 때 배에 싣고 온 해동의 최초 불탑이다.작가 일연은 1206~1289년의 인물로 고려 충렬왕때 보각
서유기는 장회소설이라 하여 전체 100회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내용으로 분류하면 대략 3부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1부는 손오공의 출생 내력, 2부는 현장 삼장의 내력, 3부는 81 난을 만나는 지옥 순례, 즉 서천취경의 여행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서유기의 작자는 오승은이라는 사람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혹자는 서유기에는 신들과 마귀들이 많이 등장하고 영생을 추구하는 점 때문에 도교의 신도가 쓰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명나라 시대의 오승은(1500∼1582)이 당나라의 대당
불자들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 흔히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성불 하세요’입니다. ‘부처님 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자 열심히 절에 가서 기도를 하고 매달리는데, 도대체 부처가 되라고 하니 덕담치고는 너무 과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서양 종교의 시각에서는 제아무리 덕담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되라’는 그 말은 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불교적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방의 상좌부 불교와 북방의 대승불교가 가지는 미묘한 차이 때문입니다. 부처님으로서 삼계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이어서 계속>>>작가의 일생은 사람에 대한 희생적 사랑과 실천이었다. 모우를 좌우명으로 삶을 꽃피웠던 작가였기에 모우는 그의 애칭이었고 호가 되었다.작가가 김해의 수많은 경승지 중에서 분산성을 택해 제영한 것은 분산성이 공격성 전투성이 아닌 어린이와 노약자를 위한 피난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작가의 형 조이추는 구암암, 초선대, 산산대 등의 시를 남겼다.타고봉 - 허 겸산술동동첨해정석인호파작봉명금봉성화류양일관조병봉주태평산을 지키며 북소리 둥둥 바다 정세를 살펴보는옛 사람이 부르던 것을 파악해 봉우리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분산은 국가사적인 분산 성곽의 무너진 부분이 복원되고 북쪽 봉우리에는 천문대, 산의 중앙부는 가야테마파크가 조성되어 가야문화의 독창성을 춤으로 연극으로 놀이 문화로 재현하며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2천여 년의 역사와 그 문화를 21세기 문명과 접목하여 꽃을 피우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시작을 하였다면 때론 차가운 이성으로 과연 가야는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거북을 만들고 알을 만들고…. 왠지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시민에게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