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루燕子樓「읍지」 공해조에 “호계(동상동의 호계천) 위에 있다. 정사년(1677)에 변국한 부사가 중건하고 정묘년(1686)에 이행익 부사가 중수하였으며 무술년(1717)에 김중구 부사가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맹세형이 시서에 말하기를 "내 일찍이 여러 곳 중에서 문정공(맹사성)이 지은 김해부의 '연자루' 란 뛰어난 시를 보고 이 루에 오르지 못함이 한이 되어 등불에 비친 먼지에도 읍하게 되었다. 다행히 피곤한 기운을 향막 (군대의 막사)에서 풀고 해진을 모두 밝아 김해부의 치소에 이르러서 이른바 연재자루
김종간이어서>>> 김종간의 미친소리 스물 한 번째 장유암백마동래자기서공문유화몽혼미천매석주비범국화상난야벽산루황대주범모화항극포조성청조계고탑인귀유상재금강기월영고저백마가 동쪽으로 오고 자주색은 서쪽이라불도 어린 화상의 꿈 혼미하여라.공주의 돌배는 비단 돛으로 나라에 들어 왔고화상의 절은 푸른산의 누각이다.거친 대의 낮 염불은 꽃의 목을 본 뜬 것이요포구 끝 물소리는 시냇물로 돋구어 듣는다.옛 탑의 사람은 돌아가고 초상만 있으니불경의 옥같은 그림자가 높고도 낮다.장유암팔경1. 춘일망해-봄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 1980년대 이후 이 경치
김종간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김종간의 미친소리 스물 한 번째은하사는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품은 고찰이다. 가락국 때 장유화상이 창건하였고 당시의 이름은 서림사 였다고 믿는다. 불교를 가지고 허황옥 공주를 수행해 와서 불교를 전파하며 서역의 모국 번성을 새로운 나라 가락국에서 기원하며 서림사를 세웠을 것이다. 서림사가 왜 은하사가 되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성 큰스님이 1970년대 주지로 부임하여 40여 년 동안 원력으로 전각 중창과 보수로 도량을 넓히며 가락불교의 큰 가람으로 발전하고 있으니 불향이 꺼지지 않기를 합장하며 새
김종간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작가 허경윤은 『읍지』가 전하기를 계유년에 태어났으며 7세에 참봉공에게 사람의 도리를 묻고 스승에게 배울 때 더욱 진취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년에 왜구가 파헤친 수로왕릉 복구를 위해 장사 100여명을 모았다. 학문이 높아 명성과 영예가 드러나 나라에서 예빈시직장을 제수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남명 조선생의 신산서원이 왜구에게 헐리자 이 곳 역시 복구하였다. 1822년에 서원을 세웠는데 구천이며 상동면에 있다. 근차판상운 - 배 전 도술창창접대선오능위불화위선야정해도삼만리학귀화표일천년 공산약기증림우고원종
김종간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작가 이학규는 1770년의 조선 후기 문인으로 본관은 평창, 호는 낙하로 한양출신이다. 문학에 뛰어나 정조의 인정을 받아 포의로 규장전운 편찬에 참여하였다.왕명으로 원자궁에 내릴 책을 지어 바쳤고 화성경리시말을 번역하였고 무이구곡도가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1801년 신유사옥에 구금되었는데 조사 결과 천주교와 무관함을 밝혀졌음에도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이해 10월에는 백서사건으로 다시 국문을 받고 김해로 이배 되었다가 1824년 4월에 아들의 재청으로 방면되었다.이 시는 『낙하생집』 12권에 실
김종간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 이세사 - 곽 여 삼추벽해천층랑일엽편주민리인원청종성심도사서유풍의욕서진 가야국엽련강초수로왕손작군민남토구도금기견편범환향해산춘 긴 세월 푸른 바다 수많은 물결일엽편주로 먼 길을 가는 사람.멀리서 종소리 듣고 이세사 찾아잠깐 행동거지 멈추고 진실을 구하리라. 가야국 왕업 강의 풀밭에 이어지고수로왕 후손은 고을 백성이 되었다남쪽 땅 옛 도읍지 이제 보았으니조각배 돌려 바다와 산의 봄을 찾아간다. 이세사는 시만 읽어서는 어느 산에 있었는지 그 흔적도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어산에 구암사, 십
김종간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구암 - 조구령휴봉책장상구암특지풍광최영남봉취설소통조도석두운단로승암행심승처녕지권시우성시불용참입안성분미해외삼한종고소기남지팡이를 벗 삼아 구암에 오르니특지 풍광이 영남에서 제일이라.부리 같은 봉우리에 눈 녹자 새의 길 열리고 돌 머리 구름 걷히자 승려의 암자 드러난다.아름다운 곳 찾아다녔으니 정녕 게으름을 알아 시를 우연히 만들었으니 부끄러워 사용하지 못한다.눈에 들어오는 비린 기운 바다 밖까지 아득하고 삼한에는 예로부터 기이한 남자 적었구나.조구령은 김해 지내동 사람이다. 대학을 깊이 연구했고 효심이 지
김종간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삼국시대는 오의 제4대 황제 손호때 '다천'을 하사 받았다고 적고 있으나 '도천'을 후인들이 고친 것이라고 한다. 도를 「한화중사전」에서는 ①씀바귀, 방가지똥, 앵속, 엉겅퀴, 국화과의 다년초 ②물억새의 이삭 ③띠꽃 ④약초 ⑤해악 ⑥속임 ⑦차 등 일곱 가지로 적고 있는데 최고의 식물로서 인간의 보배로운 식품이 된 문화사일까?구암귀석 구암암신어산은 이름처럼 김해불교의 향기가 깊고 짙다.해발 630여m의 산은 김해시 삼방동과 상동면을 경계하며 북풍을 막고 남풍을 안은 아늑한
김종간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가락국 시조 수로왕릉 서편 수릉원 입구에서 세월을 머금은 차나무와 '다조 보주태후 허황옥상'이 있다. 차나무는 2007년 3월 21일 김해시 농업기술센터 직원들이 육종학자 우장춘박사가 키웠던 것을 이곳에 옮겨심었으니 김해의 보물이 탄생한 것이다. 필자는 나무를 사랑하는 임업과 직원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시민들의 차사랑을 기리고자 그 자리에 다조상을 세워 2010년 4월 27일 가야문화축제 개회식때 개막하였다.매년 차인들이 헌다로 다조께 감사의 예를 올리고 있다.차나무에 대해서 감히 어
2012년 원광디지탈대학 동양학과 학사2017년 대구한의대 대학원 동양사상학과 석사논문 『한글성명학 이론에 관한 연구』2019년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동양학과 수료박사논문집필 중 우리 이름은 姓氏와 이름으로 나누어 말한다.그러나 통상적인 이름이라면 성씨와 이름을 붙여 칭하고 있다.성씨는 우리 이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모, 조상의 유전인자가 담겨있다고 하기도 하지만 멀리 떨어진 조상의 유전자가 전해지기보다는 직접 나에게 전해지는 부모의 영향이 다 크게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2008년 1월1일부터 시행된 호주제 폐지 후 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명월산의 명월사 주변도 몇 차례 살펴보았지만 차나무는 찾지를 못했다.필자는 김해의 차 자생지를 찾기 위해 차와 관련된 지명과 구전을 따라 2년 여간 김해의 산하를 누볐다. 동상동 금강사지 주변의 송악산 기슭과 분산 남쪽 자락에서 대규모 군락을 찾았으며 상동면 감로리의 감로사지 주변과 장유면 무계리 바위산 자락에서 차 군락지를 찾아 냈으나, 대부분 신도시 건설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동상동과 상동면의 군락지는 김해시 당국과 시민들이 지키고 가꾸며 사랑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특히 금강곡은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세종실록』21년 "관찰사 이 선이 도절제사이 교와 함께 누상에 연회를 베풀었는데 누가 무너져 8명이 압사하였다. 이로 1명이 면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불훼루 건립 후 30여 년 만에 누각이 무너진 것이다.역사를 기억 못하는 사람은 다시 그 역사를 겪게 된다고 했다. 금강사도 불훼루도 사라진지 오래지만, 불훼루란 이름을 얻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김해부사 현맹인의 노력을 기억하며 도관찰사와 도절제사로 불훼루에서 못난 짓을 하다 압사했다는 이름만 남긴 이 선과 이 교등 참 부끄러운 관리를
2012년 원광디지탈대학 동양학과 학사2017년 대구한의대 대학원 동양사상학과 석사논문 『한글성명학 이론에 관한 연구』2019년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동양학과 수료박사논문집필 중 배우 이동건(40) 조윤희(38) 부부가 이혼했다.조윤희 소속사 킹콩 by 스타쉽은 28일 공식 입장문을 통해 "먼저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송구스러운 마음을 표한다" 며 "조윤희씨는 지난 22일 서울가정법원에서의 이혼 조정 절차를 통해 이동건씨와 이혼했다"라고 밝혔다.이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갑작스러운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1406년 중시독권관 이후 영의정부사, 좌정승, 좌의정을 역임했으니 기문은 1406년 이후에 지은 것이다. 인품은 중후, 침착 대범하였으며 태종의 묘정에 봉안되었다. 후대에 그를 한나라의 장자방 송나라의 치규라 일컫기도 했다.조선 초기 최고의 문신이었던 하 륜이지만 지은 글이 음강사가 아닌 금강사 불훼루기 이니, 금강사는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고 다만 고려 때 중수한 것으로 느낄 뿐이다. 하 륜의 기문으로 해서 고려의 충렬왕이 금강사에 들려서 차나무 군락을 보고 장군수라고 이름을 내려 준 것
이 세상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기원전 500년을 중심으로, 기원전 800~ 200년까지 약 600년을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 1969년)는 차축시대(車軸時代, Achsenzeit, axle age)라고 불렀다. 역사상 대부분의 위인은 거의 이때 나타났다. 붓다(기원전 624~ 기원전 544년), 공자(기원전 551~ 기원전 479년), 소크라테스(기원전 470 ~ 기원전 399년) 등이 이에 속한다. 고법사주학의 시원
이어서 계속>>> 김종간 향토사학자 작가 기견간은 고려 고종 46년~충숙왕 17년의 인물로 뛰어난 정치가요 시인이었다. 고려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오아 등 세 임금을 모신 청치가로서 통헌대부, 민부전서, 홍문관사를 지냈으며 특히 충숙왕 4년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상주의 객관에 머물면서 두견새 소리를 듣고 지은 시로 중국에 이름을 날렸다.객사 깊은 밤 등불만 가물가물초라한 내 모습 중보다 담박하구나.두견새 울어대어간밤에 저 산꽃 얼마나 졌을까.이 시로 인해서 이견간의 호인 산화가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고려의 큰 인물이 감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고려 고종 24년 해안이 창건하였다. 충렬왕 때 원감국사를 지낸 충지가 주지로 있었다. 『태종실록』 7년 12월 전국의 자복사찰의 하나로 화엄종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금석총람』에 1731년 이 절에 진남루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조선 후기까지 존립하엿음을 알 수 있다. 진남루는 24개의 돌기둥으로 되어 있다고 적고 있어 누각뿐만 아니라 감로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이곳에는 삼층석탑재와 비석대좌, 연화대석 등이 잔존하고 있었으
김종간 향토사학자 김해의 불교와 불우에서 부른 노래찬금관성파사석탑 - 일 연재압비범천패범걸령차막해도경기도도안부황옥천고남왜알노경파사석탑을 기리며누를 것 싣고도 비단돛배 붉은 깃발 가벼워라신력게 빌어 바다 파도 놀라지 않게 고요히 속였다.어찌 황옥만을 위해 이 기슭에 닿았으랴예부터 성난 고래 같은 남쪽의 왜를 막으려 함이다.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다섯 번째파사석탑은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가 서기 48년 가락국 시조 수로왕에게 시집을 올 때 배에 싣고온 해동의 최초 불탑이다.작가 일연은 1206~1289년의 인물로 고려 충렬왕때 보각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여러분이 정성스럽게 한 계획이 완성되었고 우부사가 기문과 이름을 얻고자 하는데 내 마음을 정하는 것이 세상의 도의를 위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내가 옛날에 거닐었던 김해땅이 아닌가.'이로써 애써 사양하지 않고 누 이름을 불훼라 하고 예전에 보고 들은 것과 오늘에 마음에 느낀 바를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이 누에 올라서 이 편액을 보는 자는 진실로 본심에 구하여 탐락으로 그 절도를 헐지 않을 것이요, 함부로 행동하여 그 덕을 헐지 않을 것이요, 개인 생각으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계속>>>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작가 안 유는 고려 고종 30년~ 충렬왕 32년의 인물로 고려의 명신이요 대학자였다. 초명은 유였으나 향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다시 초명인 유로 부르게 되었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원나라를 자주 왕래하며 주자학을 배워 우리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보급하였다.그가 죽자 1318년 충숙왕은 그 훌륭함을 기리고자 궁에 있는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