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일곱 번째 사적(七蹟) 타고봉(打鼓奉)石勢崢嶸劍氣崔 석세쟁영검기최三人一鼓百夫來 삼인일고백부래北極知尊星斗向 북극지존성두향南風不競烟花開 남풍부경인화개當時示警蠻夷國 당시시경만이국後世因爲峰火臺 후세인위봉화대西陵環業無餘地 서릉패업무여지尙有高峰不入灰 상유고봉불입회돌의 형세 가팔라 칼 기운으로 우뚝하고세 사람이 한번 북 치면 일백 사람 올라온다.북극 높은 줄 알아 북두칠성을 향하고남풍은 안개와 다투지 않고 꽃을 피운다.당시에는 지켜보며 오랑캐를 경계하였으나후세 사람들은 봉화대를 만들었다.서릉의 패업은 남은 땅 없어도가상한 높은 봉우
세 번째 사적(三蹟) 연자루(燕子樓)燕子喃喃訴語微 연자남남소어미錦筵江燭竟誰幃 금연홍촉경수위高秋送兩餘霞氣 고추송우여하기中夜無人但月輝 중야무인단월휘如何太守竹樓視 여하태수죽루시林道黃塵銅雀飛 휴도황진동작비玉樹江南春意晩 옥수강남춘의만歌聲鳴咽未言歸 가성명인미언귀제비들 재잘거리는 하소연이 은미로운데비단 자리 붉은 촛불 누구 휘장에서 끼질까.하늘 높은 가을을 보내는 비에 노을 기운 남았는데밤중이라 사람 없어 다만 달만 빛난다.어찌하여 태수는 죽루를 보는가?텅 빈 길 흙먼지 사이로 산골 참새가 난다.강남의 옥같은 나무에 봄의 기운이 늦어가니노래하는
밤-내 내 영혼보다 더 큰 발자국을 쫓다울음 저문 강가에서 놓쳐버린 삶의 흔적어느덧 저녁에 들어 젖은 노을 끌고 서면 아득히 걸음 짓는 추억 속 웃음 하나삐걱대는 먼동을 부려 아침을 기다리는한 올의 불씨를 지펴 가슴 여는 저 사연 쉰내 저민 등 굽은 상념 허기진 기대도 접고뼈대 하나로 버텨 온 우리네 얼굴 반추하면새날의 봄 내음 트는 일출이 새롭다
이어서>>>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서른 여섯 번째파사석탑은 현재 김해시 구산동 수로왕비릉 앞의 파사각 안에 있다.습지의 고적(古蹟)조 '파사석탑' 이 “호계천(虎溪川)가에 있으며 무릇 5층이다, 돌빛이 붉게 아롱졌고 질은 좋으면서 무르고 조각한 것이 매우 기이하다. 전설에 허왕후가 서역(西域)에서 올 때 이 탑을 배에 실어서 바람과 파도를 진정시켰다 한다.”고 적고 있다.파사탑의 출처에 대해서는 2천년의 세월에도 그 신비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근 일부 학자가 파사석탑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적으로 비판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지
이어서>>>2. 실천정신의 현대적 발전남명을 사숙(私淑)하면서 정인홍의 제자가 되었던 정온(鄭蘊)은 병자호란때 척화(和)를 주장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자결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에서 칼로 배를 갈랐다. 그리고 노론 일당의 전횡(專橫)과 외척세력으로 인해 썩은 조정의 정치, 그리고 왕위계승에 있어서의 비리, 인조쿠데타 이후 경상우도에 대한 지나친 차별대우와 민중에 대한 탐학 등에 반기를 들고 이 지방에서 무신란(1728년)과 임술농민항쟁 (진주민란:1862년) 등이 일어났다. 이것은 민중의 힘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가 되었
이어서>>>7경(七景) 구지석람(龜旨夕嵐, 구지봉의 저녁아지랑이)山非洛汭自生龜 산비낙예자생구不受文章也最奇 불수문장야최기嵐氣一邊工擔沫 람기일변공담말海桑可變此難移 해상가변차난이산은 낙수(洛水)의 물굽이 아닌데 스스로 거북이 생겨문장(文章)을 받지 못해도 더욱 기이하다.아지랑이 한쪽에서 맑은 물방울 만들지만바다와 육지 변할 수 있어도 이것은 옮기지 못하리라.가락국 건국주를 맞이한 구지봉의 신비로움을 작가 나름의 필력으로 노래했다. 역사를 만든 신화를 일반적인 전설로 보지 않고 아름답고 신령스럽게 노래한 작가가 존경스럽다.8경(八景) 호계
금릉팔경(2) - 김건수 金建銖1경(一景) 타고청월(打鼓靑月, 타고봉의 맑은 달)城東削立月中峰 성동삭입월중봉—箭飛傳萬里峰 일전비전만리봉怪底朝霞暮靄起 괴저조하모애기半邊虛淡半邊濃 반변허담반변농분성성 동쪽 깎아지른 듯 달 가운데 봉우리화살처럼 날아 만리를 전하는 봉화대라.괴이한 아침노을 깔리고 저녁 구름 자욱하니반은 비어 맑고 반은 짙구나.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서른 네 번째이 시(詩)는 작가가 타고루에서 동북쪽 봉수대를 보고 노래한 것으로 느껴진다. 만 리를 전하는 봉수대'란 표현은 남해 끝자락 녹산의 성화야봉에서 왜구들이 탄 배를 보
3경(三景) 삼차풍범(三叉風帆, 삼차강의 돛단배)吳楚東南一帆風 오초동남일범풍瓊瑤世界色相空 경요세계색상공煙波極目迷天地 인파극목미천지竟日樣樣不緊逢 경일요요불계봉오나라 초나라를 동남으로 나누듯 바람에 돛단배 하나옥으로 단장한 세계처럼 색(色)과 공(空)이 짝하였네.안개 서린 파도 한없이 바라보니 천지가 아득하고 종일토록 흔들려서 배를 매지 못하네.삼차풍범은 삼차강에서 배가 바람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옛날 중국의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정호를 경계하고 대치한 장면에 비유하면서 배가 바람을 타고 동남으로 멋지게 가르는 모습을 노래했다.4경(景)
산해정(山海亭) - 노우수盧禹壽海碧山明屋轉幽 해벽산명옥전유行人指點帳逼遛 행인지점장핍유修儉得宜仍舊制 치검득의잉구제智仁爲貴擅閒區 지인위귀천한구季世群蒙空仰斗 계세군몽공앙두先生何日歎乘桴 선생하일탄승부起聽權夫歌一曲 기청도부가일곡萬千奇夫簡中收 민천기절개중수바다 푸르고 산 맑아 집은 두루 그윽하고행인이 가리킨 곳이 슬퍼 오래 머문다.옛 제도로 사치에서 검소함을 마땅히 얻어 지혜와 너그러움의 고귀함을 편안하게 감추었다. 말세에 뭇 사람들 괜히 북두를 우러러보아도선생이 언제 뗏목을 타겠다고 탄식하신 적 있던가.일어나 뱃사공 노래 한 곡조 들어보니한
산해정山海亭과 신산서원新山書院산해정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학문을 강설(講說)하던 곳이다.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평생을 공부와 후학 양성에 바친 인물로 경인년(庚寅年) 중종(中宗) 25년인 1530년에 30세의 나이로 김해에 왔으니, 그곳이 남명의 처가 마을인 지금의 김해시 대동면 주중마을이다.이곳에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도(道)를 행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다 48세 때 합천 삼가를 거쳐 1561년에 61세에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 갔으며 1572년에 세상을 떠났다.산해정은 순조(純祖) 23년(1823)에 중건
함허정(涵虛亭) - 이 번 李藩數日團樂作勝遊 수일단란작승유二三佳客是名流 이삼가객시명류邑因駕洛乾坤大 습인가락건곤대亭扁涵虛景物幽 정편함허경물유砌竹池荷牽逸興 체죽지하견일홍淸歌炒舞深煩愁 청가묘무척번수陳情亦恭華筵末 소용역첨화연말 滿眼詩篇愧不洲 만안시편괴불수여러 날 단란하게 경승에서 즐거운데모인 가객이 모두가 풍류명사라.고을은 가락국 도읍지라 하늘과 땅이 크고정자의 편액 '함허'라 경치와 더불어 그윽하다.섬돌의 대나무와 못의 연꽃이 흥을 자아내고,맑은 노래 아리따운 춤은 번뇌와 시름을 씻어준다.게으르고 못난 몸이 화려한 자리에 앉아눈에 가득한
남명의 시와 조 즙, 박홍미, 류여각, 정명주, 이거원, 전자윤의 흥청망청 속에 쓴 시를 찾아본다.함허정(涵虛亭) - 조 식曹植雲騰蛟屋誠無梁 신등교옥연무량虛簡酒來見直方 허개함래견직방傑閣檀南漫好大 걸각천남만호대老虯分北剩風霜 노규분북잉풍상裳花館裏笙歌咽 당화관리생가인王母池邊河漢凉 왕모지변하한량集落生涯寒落水 한락생애한락수欲將理恨引杯長 욕장리한인배장교룡에 올라 탄 신기루 같은 들보에 제비 집이 없고하나 되어 허공에 잠겼다는데 와서 보니 네모가반듯하다.훌륭한 전각 남쪽에서 만연하게 웅장하고늙은 용이 북쪽을 쳐서 바람 서리 더한다.당화관(함허정
함허정중수기(虛亭重修記) - 조 식曺植가정(嘉靖, 명나라의 연호) 정미년(丁未年, 1547)봄에 영공(令公, 높은벼슬, 정3품) 김수문(金秀文)이 정자를 새롭게 했다.황폐했을 때는 작아 보였는데 복구하고 보니 초나라처럼 크다.고요히 묵회(會, 조용히 깨달음)하니 운몽 8~9리가 온통 한 거울 속에 있음은 만물이 하늘보다 차이가 없으나 허하니 포용하여 내방을 밝혀 바깥을 통제하여 보는 것을 억제하였다.일찍이 들으니 집을 보는 자는 그 귀퉁이를 보는데 건곤이 6위와 더불어 8방에 아울러 벌려서 귀퉁이가 되었으니 네모진 것이 귀퉁이로서
『김해읍지』 공해(公廊)조에 “연자루의 북쪽에 있는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지은 것이다. 호계의 물을 끌어서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정자를 지었는데 매우 맑고 깨끗하다. 만력 을묘년(乙卯年, 1615)에 부사 조계명(曺發明)이 중창하고 정묘년(丁卯年, 1687)에 부사이행익(李行益)이 중수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최윤신은 『읍지』 환적(廣)조 보유(補遺)편에 “홍치(弘治, 명나라의 연호) 무오년(戊午年, 1498)에 함허정을 처음 건축하였다.”고 적고 정무(政務)는 청렴하고 간략함을 위주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폭군 연산군
김종간의 미친 소리 스물 다섯 번째작가 정현석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진주목사(晉州牧使)에서 1870년 6월 8일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부임해많은 일을 하였다. 무너져 내린 분산성을 다시 쌓기도하였는데 위의 시에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 왜구에 항시 대비했음을 느낀다. 많은 공적으로 1872년 12월 순영(巡營, 지금의 도청)에서 장계(狀啓)로 일품(一品)을 올려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기 만료 후 1873년 12월27일까지 연장되어 근무하였으며 특지(特旨, 특별한 왕명)로 돈녕부 도정이 제수되어 귀경하였다. 관청과 공공건물의 중수와
연자루(燕子樓) - 조 심曺深金陵佳麗古王州 금릉가려고왕주遺跡盆臺風虛樓 유적분대여연루逆旅無人勤嗣 역려무인근근사百年禎廢舊城 백년퇴폐구성두層樓高出海雲中 층루고출해운중畵棟樑映日紅 화동조량영일홍燕子亦應興廢感 연자역응흥폐감雙雙飛舞語微風 쌍쌍비무어미풍益傳終夕盛風流 배준종석성풍류不是君侯樂勝遊 부시군후낙승유辛苦一春經始意 신고일춘경시의億年王國以寧새 억년왕국이녕휴아름다운 금릉(김해)은 옛 왕의 고을남긴 자취 분성대와 연자루다.나그네 뿐이라 부지런히 지붕 이는 사람 없어오랜 세월에 퇴폐한 옛 성은 머리만 남았네.층층 높은 누각은 구름바다 속으로 솟았고그
백파선(白婆仙) -1불의 여신 정이로 알려진 (MBC 드라마) 백파선 사기장이 현시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 김해(金海)는 고대로부터 역사적 유서가 깊은 지역으로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 중 자기생산과 관련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에, ‘김해도호부(金海都頀府)의 동쪽에 하품을 생산하던 감물야촌(甘勿也村)에 1개의 자기소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현재 감물야촌의 실체를 상동면(上同面) 일원에서 문화재 정밀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 상동(上
연자루(燕子樓) - 신복하申復夏燕子樓前燕子飛 연자루전연자비年年社日有情歸 년년사일유정귀 憑渠欲問興亡事 빙거욕문흥망사惟見四陵映夕暉 유견서릉영석휘연자루 앞을 나는 제비는해마다 사일(E)이면 정으로 돌아오는데어찌된 일이냐고 홍망사를 묻고 싶으나오직 석양이 비추는 서릉(, 수로왕릉)을 바라본다.작가 신복하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가야왕국에 대한 향수가 짙 게 느껴져 온다.차 연자루 판상운(次燕子樓板上韻)- 김건수金建銖南來又見一年春 남래우견일년춘雨後江山洗劒塵 우후강산세검진斜日城西怊悵意 사일성서초창의可憐埋沒古今人 가련매몰
이어서>>>연자루(燕子樓) - 맹석흠孟碩欽先祖遺墟認幾春 선조유허인기춘寶欄朱閣闃芳塵 보란주각격방진百年往事憑誰問 백년왕사빙수문園素蒼茫似語人 원소창망사어인선조 남기신 터에 몇 년 만에 찾았네보란 주각이 더없이 아름답고 고요한데.지나간 백년의 일 누구에게 물을까원구단본디대로 있어 아득한 옛일을 말하듯 하다.작가 맹석흠은 좌의정(左議政) 맹사성의 증손으로 1429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모른다. 세조(世祖)때의 무신이었다. 무 과에 급제한 뒤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세조 13년(1467) 5월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을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