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그것도 신의 아들 또는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주장은 프로이드가 그의 저서 『종교의 기원』에다 적어둔 글입니다. 실제로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인류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재앙들과 직면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자로부터의 보호라는 요구가 대두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신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은 불확실한 세상 속에 던져진 인류의 강함에 대한 의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았다. 나는 '이들이 번뇌이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렇게 알고 보니 나의 마음은 육체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어리석음의 번뇌로부터 해탈했다. 해탈하고 보니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겼다. '태어남은 이미 다했고, 청정한 삶을 이루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과학적인 도구 하나 없이 맨 몸으로 풀방석 위에 앉아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과 뼈를 포함한 모든 형상과 우리의 모든 감정과 지각들이 합성이 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합성이 된 것이란 여러 개의 성분들이 합쳐져서 생긴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못과 나무는 탁자가 되고, 물과 찻잎에서 차가 생겨나고, 공포·헌신·구원자로부터 신(神)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 결과물은 합성을 이룬 각각의 부분들로부터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재로 그것이 독립적으로
깨달음을 이루던 날 밤에 부처님은 세상에 실재하는 요소들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했습니다. 부처님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들은 의미론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무엇이 있기 때문에 갈애(渴愛)가 일어나는가? 무엇이 갈애의 조건이 되고 있는가?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주어진 조건을 만들거나, 낳거나, 산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정지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라는 실체가 있을 때 무엇으로 부터 기인하였는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실체의 조건이 되었나를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들에 이어지는 단언과
불교는 보편적인 법칙을 주창함과 동시에 진리의 체득을 통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와는 달리 보편 법칙의 객관화를 추구 하는 과학은 주관적인 체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과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한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 점이 불교를 '앎의 종교'이자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뉴턴은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고는 단지 그 이름만 명명한 법칙의 발견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
"자신과 타인의 모습을 관찰하고 내가 어떤 경우에 화를 내는지를 알아차려라. 그러면 마음속의 화가 서서히 사라지리라." 이 말은 과거에 경험했던 한 정서적 사건을 털어 내지 못해서이거나, 또는 자신 안의 무의식에 항거하지 못해서 종종 트라우마에 끌려 다니며 고통 속에 빠져 살아가는 중생들을 향해 충고하는 법어(法語) 중 한 구절 입니다. 이 법어는 세상만사를 '있는 그대로 보면' 무의식 속의 응어리가 풀린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응어리인 트라우마야 말로 가장 질긴 인연이며, 미래와 관련된 가장 두려운 인연으로 존재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는 곧 우리의 참마음인 것이며, 여기에는 나와 남,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시간과 공간, 유와 무, 생과 멸 등의 모순이나 대립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순과 대립은 중생들이 진리에 무지하여 욕탐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난 허망한 망념인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제대로 알아 스스로의 마음속에 있는 욕탐의 방향만 바꾼다면 그대로 모든 모순과 대립이 사라진 열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욕탐을 없애거나 버리라는 것으로 잘못
부처님은 연기(緣起)의 진리를 깨달아 결국 죽음의 고통을 피해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모든 것은 연기에 따라 서로 의존하고 변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무아’와 ‘무상’의 이름으로 절대시 합니다.모든 것들은 다른 어떤 것의 존재와 인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덧없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덧없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의미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아무리 작은 변화라 할지라도 변하는 것은 무엇이건 덧없음
『넓은 숲에 무서운 호랑이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곳에 가서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는 날마다 짐승들을 잡아먹고 먹다 남은 가죽과 뼈들을 그대로 버려두었다. 이내 숲은 더러운 짐승의 시체로 가득차고 사방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자 나무의 신이 산신령을 찾아가 말했다. “여보게, 사자와 호랑이 때문에 우리 숲이 더러워지고 있네. 그러니 저놈들을 쫓아내야겠네.” 산신령이 말했다. “여보게, 우리는 저 호랑이와 사자 덕분에 살고 있네. 저들을 쫓아버리면 이 숲은
가톨릭의 교리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정화를 받기 위해 머물고 있는 장소인 '연옥'이 있습니다. 연옥이란 라틴어로 'Purgatorium'이며 깨끗하게 하다, 정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연옥이란 심판을 기다리는 정화의 장소를 말하며,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 날 것인가? 아니면 죽으면 그만일까? 라는 궁금증은 우리 중생에게 있어서는 풀리지 않은 숙제 중 하나입니다. 불가에서는 육체가 죽으면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서 영생한
고려 고종 때의 고승인 진각스님은 우리에게 깨달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결박하는 것도 결박을 푸는 것도 남이 하는 일이 아니다. 풀거나 얽어매는 것이 타인이 아니라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깨닫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되,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고 놓아버릴 것 없는 그것마저도 다시 놓아버려야 한다. 그 경지에 이르면 위로는 우러러 잡을 것이 없고, 아래로는 자기 몸마저 없어져 청정한 광명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천길 벼랑에서 마음대로 붙잡고 기회를 따라 움직이
서양에는 존재의 개념으로 'ALL OR NOTHING' 두 가지로만 구분을 합니다. 'ALL'이란 전부를 뜻하는 말로서, 존재는 있지만 자기가 포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또 ‘NOTHING'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유(有)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입니다. 이는 또한 자기 부정의 세계를 의미합니다.그러나 불교는 ALL과 NOTHING 이외에 ‘공(空)’이라는 세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세계는 서양의 유와 무의 대립을 초월하여 유와 무를 하나로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대부분의 종교가 형이상학적 절대자들을 영적인 삶의 목적의 근원으로 설정한 탓에 우리는 무조건 믿고 의지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맹목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요까지도 아무런 저항이 없이 수용합니다. 대표적 종교의 하나인 기독교에서는 신은 두려움의 신이며, 죽은 후에 나쁜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가복음 12:4-5」에서는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어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겠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서 경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룬 세존(世尊)은 나이란자나 강변의 보리수 아래 앉아 있었다. 한번 앉은 채 칠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렸다. 칠일이 지난 다음 선정에서 깨어나 초저녁 무렵에 다음과 같은 차례로 연기(緣起)의 법을 관찰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의 진리에 대한 설명입니다. 연기란 인연 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인데, 모든 존
요즘 뉴스나 신문을 보게 되면 온통 끔찍스러운 참사와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너무나 삭막하고 살벌해진 세태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인가? 이러고도 그들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이러한 참담한 인간관계의 발단을 더듬어보면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탐진치 삼독이 그것인데, 정말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어리석음입니다. 무명(無明)에 가려져 비롯된, 어리석은 인간의 탐심과 성내는 마음이 큰 화를 불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혼란했던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바꾸어 놓게 되는 훌륭한 경영전략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바로 시스템 이론입니다. 시스템이론은 1930년 독일의 생물학자 베르탈란피가 생물학·물리학·화학 등 자연과학 분야는 물론 사회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분야를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인 일반시스템이론을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이 이론은 1950년대에 들어서 경제학자 보울딩이 시스템이론의 목적과 기본적인 골격을 작성하여 시스템일반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였고, 그 후 죤슨, 카스트와 로젠즈웨이그 등의 학자들이 시스
불가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열반(涅槃)’입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를 음역한 것으로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寂) 등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서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서방의 종교와는 달리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여야만 바른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매달립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마치 무지개와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게 됩니다. 잡으려 하면 잡힐듯 하지만 잡으려 한만큼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이러한 고충을 부처님이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친히 깨달으신 법의 규모는 이 숲을 가득 덮고 있는 나뭇잎들만큼이나 무량한데, 우리에게 베푸신 법은 그
불기 2562년(서기 2018년) 1월 24일(음력 12월 8일)은 성도재일입니다. 이 날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신 날로 불교인에게는 매우 뜻 깊은 날이며 부처님 탄생한 날과 함께 큰 명절에 속합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일반 사찰에서는 불자들이 발심하여 정진하는 철야 법회를 봉행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을 본받으려는 우리 불자에겐 오히려 부처님 오신날 보다 더욱 뜻 깊은 날이 되기도 합니다. 불가에서 명절을 꼽으라고 하면 부처님 오신날(음력 4월 8일)을 비롯해서 성도절(음력 12월 8일), 출가절(음력
부동산의 양도시기는 원칙적으로 잔금청산일이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대출관계나 수용 등의 경우 잔금보다 등기이전이 먼저 될 수 있는데 이때는 등기접수일이 부동산의 양도시기가 된다. 즉 둘 중에 빠른 날이 양도시기가 된다.이것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양도소득세는 일반적으로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양도한 총소득에 대하여 누진세율을 적용하기 때문에 올해에 여러 건을 양도하여 양도차익이 많은 상태에서 연말에 또 한건을 양도한다면 양도소득세가 추가로 많이 나오기 때문에 잔금을 내년 1월 1일 이후로 하면 올해는 합산되지 않고 내년에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