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유득공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영조 25년 1749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본관은 문화, 호는 영재(冷齋)이다.영조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시문에 뛰어나 1779년(정조3년)에 규장각 검서로 활약하였다. 제천, 포천, 양근(경기도 양평의옛 지명) 등의 군수를 지냈으며 말년에 풍천부사를 지냈다. 특히4천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의 전도(奠2)와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가 있다.무제(無題, 가락고도에서 부른 노래) - 김학순金學淳東風歇馬問城門 동풍헐마문성문駕洛遺墟古俗存 가락유허고속존
햇살이 제법 눈부시다. 미간을 좁히며 무연한 눈초리로 올려다 본 건너편 아파트 꼭대기의 하늘이 진한 파랑의 물감을 풀어놓은 양동이속 같다. 마음도 덩달아 파랗게 번져가며 너그러워진다. 습관처럼 다시 올려다 본 하늘 낮은 쪽에는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다. 하천변에는 헝클어진 가지사이로 핀 선명한 노란 개나리가,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조화처럼 팽팽하게 뭉친 연분홍의 벚꽃이, 벚꽃이 아니라는 항변의 표시로 하얗게 질린 앵두꽂이 각 자의 구역을 정한 듯 간격을 두고 만개해 있다. 은은한 속삭임이 사부작사부작 날린다. 최상
이어서>>>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예순 번째작가 권 근은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로 공민왕 1년~태종 9년(1352~1409)의 인물로 호는 양촌이다. 1368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지신사 등을 거치고 첨서 밀직사사를 지냈다. 유배 생활 중에 조선 개국을 맞이하였다.성리학자로 이 색을 스승으로 모셨고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이승인, 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류하며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조선)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데 크게 공헌 하였다.고려 말 벼슬길에 나아가 나라의 패망을 겪고
우리는 본래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와 나 둘로 분리되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남의 것을 탐하고 남의 몸을 해치는, 오늘의 우리는 분명 잘못되어 있다. 내가 존재하는 시점에서 과거로 되돌아가 보자. 내 바로 위에는 부모님, 그 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 다음엔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5대조, 50대조, 100대조 . . . 계속 올라가면 사람의 시조가 나타날 것이다. 태초에 인간의 시조가 있었고, 인류의 역사가 이어져오는 동안 계속하여 자손이 태어나, 오늘 날 60억의
이어서>>>작가 조 준은 고려 충목왕 2년~조선 태종 5년(1405)의 고려 말조선 초기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 호는 우재(齋),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上)와 결혼, 정도전과 함께 개혁파에 속하면서 이성계 이방원의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1382년 병마절도사 최 영의 천거로 경상도에서 왜구 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와 병마사를 징벌해 기강을 세웠다. 그 뒤 이성계를 만나 개혁을 도모하여 이인임, 조민수를 탄핵하고공양왕을 옹립, 이성계, 정도전 등과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1392년 정몽주의 탄핵으로 정도전
이어서>>>지금의 가락동사무소 서남쪽 작은 구릉은 대나무가 많아 죽도(竹島)라 했다. 죽도를 안고 흐르는 서낙동강에는 전함의 기지로 수군(水軍)의 주사화약고(舟師火藥庫), 해창(海倉), 대변청(待變廳) 등이 있었다.대변청은 해창의 남쪽에 있었으며 인조(仁祖) 24년(1646) 부사 이상경(李尙敬)이 건립하여 전함과 군기(軍器)를 설치했고 효종(孝宗) 즉위년(1649)에는 부사 박경지(朴敬社)가 수군 전용 창고인 해창(海倉)을 건립하고 대변청에 전선(戰船) 한 척과 군기(軍器)를 갖추었다. 이곳에는 황자호(黃字號) 한 척, 병선(兵船
닮아가기 옛날, 한 선비님이 사셨어기묘사화로 관직을 버리고 학문의 길로 나섰지산해정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쏟으며실천사상 경과 의를 추구하셨지참된 마음올바른 것을 따르고옳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라난 누구를 닮아야 할까?조식 선생님의 높은 뜻가슴 깊이 새겨바람 부는 날이면 깃발로 펄럭여야지*남명 조식선생님 의를 따라
작가 안 축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순흥의 죽계(竹溪, 지금의 경북 풍기)에서 세력기반을 쌓아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였다.이 시는 문과 급제 후 금주사록(金州司錄), 즉 김해지방의 군사 책임자로 있을 때 지은 시로 짐작된다. 원(元)나라의 과거에도 급제하고 고려의 정당문학을 지냈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과 죽계별곡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정(文貞),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배향되었다.칠점산(七點山) - 노사정盧思程三水中間比点山 삼수중간칠점산相親恰似弟兄班 상친흡사제형반居人只是兩三戶 거인지시양삼호旵始遺風常就閑 참시유풍상취한세
2년 전 겨울 들며 솜바지를 샀다. 거위 털, 오리털이 아닌 인조 솜이다. 10만원을 주고 3개를 사고도 돈이 남아, 이건 싸구려구나 했는데 입고 나가도 촌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우물쭈물하는 내가 어찌 드물게 잘한 일이다. 기차나 버스가 없는 곳이면 차를 몰고 가지만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장거리에는 운전이 피곤하기도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시내에서는 버스나 전철을 타고 어지간한 거리는 걷는다. 지난여름에는 에어컨을 몇 번밖에 켜지 않았다. 날씨가 춥기 전에 천을 떠서 책상용 커튼을 만들었다. 책상
이어서>>>작가는 충숙왕 5년(1318)~우왕1(1375)의 인물로 고려의 문신이다.본관은 담양, 호는 야은(隱)이다.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해 제주사록으로 임명되고 1347년(충목왕 3년) 기황후(皇后, 고려 출신의 중국 황후)의 친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의 죄를 다스리다 그가 옥사하여 잠시 옥살이를 하였다. 1343년 홍건적의 난 때 남행하는 왕을 호종하여 2등공신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 문하평리 등에 올랐다가 이첨, 이인임 등의 사건에 휘말려 귀양 가던 중 1375년에 죽었다.위의 시는 그가 경주판관으로 있을 당시
언젠가 세상살이 시詩살이 사투리 인생 토론을 했다. 시대가 왜 이러냐며 전화통이었지만 우스꽝하고 유쾌한 경상도 아줌마 둘의 속사정은 진지했다. 굳이 시詩라는 이유로 표준어라고 수도권의 언어에 붙잡혀 시성의 한계에서 멈출 것인가! 동시다발로 각자 사는 곳에서 시어를 있는 대로 찾자. 있는 그대로의 시詩가 여기 진짜 시詩다. 전영귀 시인은 ‘사투리가 사라지는 건 언어의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어느 학자의 안타까움에 힘입어, 시인으로서 몇 편의 방언方言 시를 남기기로 작정하였다. 그 중, 꽃술의 모양새가 바늘과 몹시 닮은 ‘바
밤낮으로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 천 개의 눈과천 개의 가슴과 손으로상심한 민초를 위무하신다당신의 추운 등은 아랑곳없이,
남포범주(南浦帆舟) - 안혁중安赫重佩酒携朋問買舟 패주휴붕문매주南來第一此明區 남래제일차명구白鷗驚起緣蘋岸 백구경기녹빈안彩鷄浮來明月洲 채익부래명월주借問蒼江今夜興 차문창강금야흥何如赤壁昔年秋 하여적벽석년추茫茫皆点三叉裏 망망칠점삼차리隋處風流資意遊 수처풍류자의유술병 차고 벗 이끌어 배 빌려 탄 곳남쪽에서 제일가는 명승지 남포라네.갈매기는 파란 마름풀 언덕 위를 나르고 화려한 배는 달빛 어린 언덕으로 떠간다.오늘밤 푸른 강에서 느끼는 이 흥겨움 적벽강의 옛 가을과 같을까.삼차강의 칠점산은 아득하고풍류는 곳곳마다 정겨움에 넘친다.작가는 김해 진례
이 작품은 러시아 작가인 알렉산드로 솔제니친(1918~2008)의 자전적 소설이다. 솔제니친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당시 친구에게 스탈린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적발돼 8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다. 1962년 문학지에 에 중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함과 동시에 소련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반체제 작가로 유명인사가 된다.주인공은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로 40살이며 수용소 번호 췌-854, 104반원이다. 농부였던 그는 독일첩보원으로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교정 노동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자신
이어서>>>유배지流配地 도화동桃花洞영모대水素臺김종간의 미친 소리 마흔 네 번째가락국 도읍지 김해에 유배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일반 시민들에게는 뜻밖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김해는 과거에도 오지나 외딴 섬 등 다른 유배지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요로운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유배객들이 거처했던 곳도 김해읍성 가까운 마을이었다.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과 동부승지(同副承旨) 정형익(鄭亨益)이 김해부의 도화동(桃花洞, 지금의 서상동)에서 1533년과 1721년에 유배생활을 했다. 포의 이학규(李學達)도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1801
춘분이 지난 거 같은데 찬물에 냉기는 겨울을 머금고서 아직은 조석으로 손이 아려져 온다.늦은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는 거의 폭우 수준으로 거세게 강풍 함께 쏟아지고서 요란하게 뒷간에 놓인 패널 지붕 천장을 맹렬하게 때리고서 있다. 추녀 끝에 매달려 굵은 비는 한 다발이 되어 어둠 속에 짙어진 골을 따라 내리는데 희미하니 빗줄기 사이로 처량하니 오갈 데 없는 몸 하고서 아직은 이른 봄인데 철이 일러 길을 잃어버린 빗소리에 놀란 참개구리 정신 줄 놓았는가. 오늘따라 두개의 굵은 눈망울 굴리면서 잔뜩 두려움과 겁에 질린 표정 하고서
이어서>>>산산대蒜山臺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마흔 두 번째산산대는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 앞에 있다.옛날에는 낙동강 가의 작은 섬으로 녹산의 범방대(泛防臺), 부산 사상의 강선대(降仙臺) 등과 함께 경승지로 이름난 곳이었다.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에는 산산대 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낙동강 본류가 갈라져 이룬 삼차강(三叉江)을 돌아 칠점산(七點山)으로 뻗어 흐른 물길이 장관이었다고 한다.중종(재위 1506~1544) 때 전라우수사를 지낸 류 용(柳塘)이 이곳에 대(臺)를 쌓아 낙오정(樂吾亭)을 지었다. 그의 아들 전주판관(全州
이어서>>>김백일 교장은 이리 교육대 시절 3연대장이었다. 지금은 사관학교 교장이었다. 나는 이리 교육대에서 연대장 관사를 심부름으로 드나드는 유일한 후보생 중 하나였다. 그래서 거드름을 피웠다. 내 말에 아주머니는 단번에 표정이 달라졌다.“그럼 우리 장사를 계속해도 되겠네?”라고 하면서 화색이 돌았다.“물론이죠 계속 돈 벌게 해 주겠습니다.”. 라며 속삭이듯이 내가 말했다.그날부터 나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빵을 원 없이 사다 먹는 특혜를 누렸다.우리 후보생 내무반은 건물 2층에 있었다. 때문에 내무반을 가려면 1층 현관을 통과하
초선대(招仙臺) - 조이추曺爾樞加耶古國鐵寒烟 가야고국쇄한인海上高臺獨歸然 해상고대독규연王業吾知如是止 왕업오지여시지不招賢者反招仙 불초현자반초선가야 옛 나라 찬 안개에 잠기고바다 위 높은 대(臺) 홀로 우뚝하구나.왕업은 내 알 듯이 이와 같이 그쳤으니현자를 부르지 못하고 초선대를 돌아온다.작가 조이추는 김해 삼안동 출신으로 1671~1707년의 인물이다.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읍지』 인물(人物) 조에 실려 있으며 성리학자로서 당대 고을 최고의 사림(士林)이었다. 숙종 33년(1707)에 47세로 죽자 사림에서 예암사(禮岩祠)를 세
이어서>>>전선에서나뭇가지 틈새로마알간 해가용기 하나로 세상을 정복해 간다세찬 파도가 밤새 울다조근조근 사연을 털어 놓으려숨 고르기 한다이불 푹 덮어쓰고 끙끙 거리던산자락도 툭 털고 일어나려움틀 꿈틀 거린다지평선에 발그레 불쑥 떠오르는 빛밀어냈다 당겼다 하는 사이파도는 하얗게 웃는다날개를 펴 내려 앉은 산자락으로찬 바람을 후우 불어 주면조국 수호 사명을위국헌신으로 응답하라용사들이여!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여유는 없었다. 기상해서 저녁 점호까지 고된 시간이었다. 중대 훈육관이었던 오종성 장교는 식사시간에 반찬이 단무지뿐일 때는 코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