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들목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서북쪽으로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2~3일 정도 걸릴 거라 생각하고 짐을 싼 배낭이 옆 좌석에 불룩하게 사람처럼 앉아 있었고, 아내가 챙겨준 간식거리를 담은 아이스팩도 뒷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 집을 떠나보기는 방학기간에 갔던 교육연수를 제외하고는 류인태에게는 오랜만인 것 같았다. 대학교 2학년 때에 의기투합한 친구들과 지리산 천왕봉을 등반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지리산을 과소평가하고 준비도 허술한 채 떠났던 3박 4일간의 지리산 여
5 산해정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10시 20분이었다. 좁은 동네에 주차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조바심을 내면서 앞차를 따라가다가 ‘산해정 400m’표지판을 보고 남의 집 담벼락에 최대한 붙여서 주차를 하고 카메라를 챙겨들고 걸었다. 작은 공간만 있으면 모두 차량이 주차하고 있었다. 나지막한 구릉 위에 앉아 있는 절집 같은 건물을 지나자 산해정의 기와지붕이 보였다. 걸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산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산해정을 감싸고 있는 듯이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정문인 진덕문(進德門) 막 들어서니 ‘신의전 궤!’라고 외치는 소리
4 당신 일어났어요?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내가 우윳병을 들고 막 주방으로 가려다 말고 류인태를 바라보며 아침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머리는 부스스 했지만,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에 스민 미소가 예쁘게만 보였다. 류인태는 손 키스를 보내며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아내는 작은 아이가 감기에 걸려 이틀째 아이 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류인태가 학교에 사직서 내고 일찍 집에 돌아온 날,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는 당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 한다며, 15년 동안 편히 쉬지도 못 했는데 여
3 며칠이 지나도 ‘학교폭력심의위원회’는 열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교감실을 드나드는 인성안전부장 송영길 선생의 말이 달라졌다. ‘학폭위’문제는 어렵게 꼬여가고 있다. 교감 선생님께서 여기저기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학폭위’자체를 열지 않을 모양이다. 가해학생들의 부모들이 피해학생의 치료비와 적절한 보상을 해 줄 테니, 3학년인 가해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졸업하게 해 달라고 한다. 3학년 네 명을 전학 시키는 것보다 피해학생 한 명이 다른 학교로 전학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느냐고 가해학생 부모들이 전교생을 대상으로 서
1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복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그 소란이 점점 류인태가 수업하고 있는 교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야! 류 선생 어디 있어! 밖으로 나왓! 칠판에 수학문제를 적다말고 몸을 돌려 교실 출입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거칠게 문이 열리더니 몇몇 학생들이 들어서서 류인태를 노려보며 조롱하듯 능글맞은 표정으로 째려보다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을 돌려 나가자, 이번에는 학부모로 보이는 서너 명의 어른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면서 니가 선생이야! 이 자식 맛 좀 봐라! 하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순
타오르는 여름의 끝자락, 고향 시골 마을의 종갓집 사당으로 향했다. 작은 강의 지류가 큰 강과 만나는 곳, 보(洑)를 끼고 자리 잡은 깡촌 마을이다. 작년 폭우 때 강변 둑이 무너져 근처에 있는 가옥들은 모두 수몰되고 부서졌다. 어머니의 시골집도 마찬가지였다. 비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곳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사당의 꼭대기에 시선이 집중되기보다 정글과 같은 무성한 덤불에 살짝 기가 눌렸다. 그동안 무럭무럭 잘도 자랐구나. 요즘은 잡초제거 대행 서비스나 약을 뿌리면 한 번
남명 조식 선생은 창녕 출생인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항, 이준경, 정수침, 성혼 등과 교류하였고 퇴계 이황과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년배로서 서신 교류를 통해 학문과 철학을 논하기도 했는데, 남명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천문지리와 병가, 노장사상까지 두루 섭렵한 최고의 학자였다.당시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당파싸움이 한창인 조정을 비판하며 오로지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그런 그의 명성을 조정에서도 크게 인정하여 중종과 명종, 그리고 선조에 이르기까지 3조에 걸쳐 왕의 부름을 받았지만 남명은 끝내 관직을 고사하고 평생을 경(敬
5. 남명 조식과 홍의장군 곽재우명철스님과 경수는 다시 공양터에서 찻물을 끓이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찻물이 금새 뽀로로 끓어 오르고 증기가 유리주전자 뚜껑을 부르르 밀어올리자 명철스님이 찻잔에 뜨거운 주전자 물을 따랐다.찻잔 속의 녹차필터가 얼마 안 있어 불끈 솟은 근육을 자랑하며 찻잔 수면위로 떠올랐다."면벽수행을 처음 하니 많이 힘들지요?"명철스님이 찻잔을 들어 입에 가까이 대며 물었다."네. 그런데 스님 수행하시는데 제가 방해를 한 것 같아 송구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제가 수양이 부족하고 가끔씩 찾아오는 참을 수 없는 편두통이
9) 굴암산의 망해정(望海亭)굴암산(窟庵山)은 해발 662m로 장유면 율하리에 주소를 두고 남해를 바라보며 진해의 웅천을 경계하고 있다. 이 산에 굴암이라는 암자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나 굴암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필자는 산에 올라 먼 옛날 허황옥 공주가 배를 타고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들어왔을 바다를 바라보다 망해정(望海亭)이라 이름 지었다.후기김해의 아들로 감사하며 살아은 삶을 돌아보며 글을 썼습니다. 사연 많은 삶이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내 인생의 좌우명은 '십목소시(十目所視),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였고, 가야' 는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면 지금 당장 경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한천수 시장과 정리를 하고 그를 배신해야 한다. 조상연 실장은 제 스스로 경수의 심복이라 자처했지만, 그는 약삭빠르고 사리에 밝아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다. 아내와 딸, 그리고 경수의 부모님은 처음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떠나 대학 교직에 몸담을 때까지는 그러려니 경수의 뜻을 존중해 주었지만, 다시 한천수 국회의원을 따라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또 한천수 시장을 따라 정무부시장으로 변신을 거듭할 때마다 경수의 성격을 잘 아는 가족들은 걱정과 우려를 쏟아냈다.재력과
7) 금병산의 금병정(金屛亭)진영읍 진영리의 뒷산은 271m의 높이로 병풍처럼 길게 진영읍을 두르고 있어 비단 병풍처럼 생겼다고 금병산(錦屛山)이라 부르기도 했다.금병정을 세운 이후 한 읍민이 왜 비단 금자를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조선 실학자 정약용은 역사의 용어는 옛것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필자도 1985년 서울서 김해로 돌아와 학원을 설립하고 가야(伽耶)’웅변학원이라 했고 가야문화운동을 제창하고 가야문화연구회를 창립할 때는 '가야(伽耶)'라 했고, 역사문화지를 창간할 때도 제호를 가야(加耶)’라 붙였다. 그 이유는 가
이어서
5) 임호산의 임호정(林虎)이땅의 지세가 남해로 달리다 김해를 위해 멈추었을까? 풍수지리설은 가락국의 우백호가 임호산이요 좌청룡이 고조산(남산)이라 했다는데 습지는 임호산을 “가조산(加助山)으로 김해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속명은 유민산(流民山)이다.”라고 적었다. 임호산, 가조산, 유민산 외에 호구산(虎邱山), 안민산(安民山), 봉명산(鳳鳴山), 임방산,악산(惡山) 등의 이름이 있다. 호랑이와 관련된 이름들은 산의 형국이 호랑이 혹은 호랑이 입 같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고, 정상부 바로 아래 흥부암(興府庵)은 가락국 시절 그 호랑
神魚亭記加耶는金海의옛나라다기이한 자취가많은데만리西域인도아유타국옛文化를 소롯이품었다경남은행이육가야천교의역사를 뜻하는육각지붕으로神魚亭을 정상에우뚝세우니바람도 달빛도 쉬어가며加耶의 노래를 부른다山이좋아山을찾는加耶의후예들이이樓에앉아땀을씻고숨을고를제山의신비는더욱아름답게가슴을적시리라2008년입동절4) 백두산의 백두정(白頭亭)김해시 대동면 괴정리와 초정리 뒷산은 천지(天池) 없는 백두산이다.높이는 352m로 2752m의 북녘 백두산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낙동강과 남해를 바라보는 그 감회는 높지 않은 백두산이라서 더욱 뜨겁다.백두정 건립으로 더욱
2. 명철스님"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스님의 법문은 스님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최고로 치는데..스님께 거짓을 말씀드릴 수는 없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좀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어 머리도 좀 식히고 정리도 할 겸해서 조용한 곳을 찾던 차에 불현듯 스님과 이 산사가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스님께 어려운 청을 하게 됐습니다."경수가 주절주절 자신의 갑작스런 방문을 해명하자 명철스님은 다시 빙긋이 웃으며 경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말을 이었다."그랬군요. 하여튼 멀리 이곳까지 찾아주신 손님이시니 머무는 동안 좋은
21세기 금바다의 산에서 부른 노래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김해는 “경상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낙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김해(金海) 칠성포(七星浦)이며 김해로부터 상주(尙州)까지, 서쪽으로 진주(晉州)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김해는 오직 경상도의 수구(水口)를 관할하여 남북의 육상과 해상의 상리(高利)를 모두 차지한다. 공사간에 소금을 판매하여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택리지』는 그가 벼슬을 떠나 30여 년 동안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조선을 여
1. 산사에서지방선거를 석 달여 앞두고 산사를 찾는 경수의 발길이 무겁다.매년 석가탄신일이면 굳이 바쁘니 이런 작은 산사에는 발길 하지 않아도 된다며 손사래를 치는 주지스님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 넘기고 행사의 맨 마지막 일정으로라도 늘 찾던 산사였다.사실 경수는 거기가 어디가 되었던지 지역 주민들이 있는 곳이면 꾸역꾸역 행사일에 맞추어 가서 눈도장을 찍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별짓을 다했는데 불자라면 다 모여드는 석가탄신일이라면 당연히 연등 아래 모여드는 불자들의 불심, 아닌 표심을 얻으려고 무리해서라도 찾아다녔다.사월초파일이
새는 옛 나라 천년 성곽에서 울고나무 늙은 유허에는 백성의 집이요.다행히 살아서 요순의 세상 만났으니해동 을 노래하는 소리에 파도 일어나지 않는다.무제 2(無題 2, 가락고도의 노래) - 권 복權金陵昔日盛繁華 금릉석일성번화往迹蒼茫首露家 왕직창망수로가龜旨如今者蝕石 구지여금태식석虎溪依舊月籠沙 호계의구월롱사王京極目思千里 왕경극목사천리客室無心海一産 객환무심해일애吏退公庭簾幕靜 이퇴공정렴막정終朝空對槿紅花 종조공대근홍화금릉은 옛날 성하고 번화했던 곳옛 자취 아득한 수로왕의 나라다.구지봉은 지금도 이끼가 돌에 붙었고호계천은 옛날 같이 달이 모래를
평소 활어 회를 많이 즐겨먹는 편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생선의 종류가 있다. 참치회, 방어회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기름기가 있어서 찰지고 비린내가 덜 나는 듯해서이다. 친구들과 가끔 이용하는 횟집이 있는데 가격이 비싼 편도 아니고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은 본 음식인 회가 나오기 전에 곁들이로 나오는 음식이 맛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번데기부터, 초밥이 나오고 꽁치구이, 소라, 멍게 등의 해산물, 회를 다 먹으면 매운탕에 후식으로 새우튀김이 나온다. 방어 한 상이라는 상차림을 시키면 회보다 더 좋아하는 곁들이 음식을 배불리 먹을